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키타바타케 아키이에 (문단 편집) == 평가 == 일본의 [[제갈첨]]으로 불리우고 있는데 북조의 군대를 여러번 격파하고 충심이 뛰어난 무장으로 천황의 신뢰를 받았다. 제갈첨과 유사하게 능력치는 부친보다 떨어지지만 충심만큼은 부친 못지않았다는 평가를 일본에서 받고있으며 하필이면 촉한의 제갈첨과 정말이지 비슷한 인생을 살다가 최후를 맞이했다. 제갈첨과 아키이에의 부친들인 제갈량과 키타바타케 지카후사는 [[계한]]과 [[남조#s-1.2|남조]]를 혼자서 지탱한 명신으로 문무에서 뛰어난 인재였으며 제갈첨은 [[한회제]]의 부마고 키타바타케 아키이에는 천황의 3남인 모리요시 친왕의 처남으로 둘다 황실과 인척이었다. 그러나 다른 점도 있으니 제갈첨은 어디까지나 인척이지만 키타바타케 아키이에는 [[황적이탈]]을 해서 그렇지 황실과 뿌리가 같아 [[고다이고 덴노]]의 황야(皇爺)다. 제갈첨은 면죽전투에서 위군의 항복을 거부하고 결사항전하다가 전사했고 아키이에 역시 이시즈 전투에서 북조군의 항복을 거부하고 200여명의 병사들과 결사항전하다가 전사했다. 다만 다른점은 제갈첨은 제갈량의 죽은뒤 한참에야 활동한 반면 아키이에는 이미 부친과 같이 활동을 했으며 지카후사는 61세로 당시 기준으로 장수했으며 오히려 아들인 아키이에가 먼저 죽은점이 제갈첨과 다르다. 또한 비운의 잘생긴 청년무장 이미지가 있어서 아버지인 지카후사보다 훨씬 유명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